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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문화 : 복음화의 길


 

I. 소음 시대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불광동 성당 사제관이다.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우람하게 세워진 성당은 누가 보아도 장엄하고 성스럽게 느껴진다. 한국 건축계 거장이었던 김수근 선생의 작고하기 전 마지막 종교 건축물이라 건축학도뿐 아니라 일반인도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뉴타운과 지역재개발로 거주민과 교통량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그에 따른 각종 소음과 매연 때문에 성당 건물이 몸살을 앓고 있다. 작년에는 성당 바로 뒤편에서 아파트 공사가 진행되면서 지하를 뚫는 소리와 진동으로 그만 성전 외벽에 금이 가고 일부가 무너질 위험에 놓인 적이 있다. 배상에 비협조적이었던 건설업체와 불가피하게 물리적 투쟁을 할 수밖에 없어 데모를 하면서 시끌벅적했다. 다행히 보상을 받고 말끔하게 수리를 마쳤다. 소음을 만드는 건설현장, 그 소음에 피해 보는 인근 주택, 보상처리 과정에서 빚어지는 언쟁과 마찰 등 모든 문제가 소음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각종 소음으로 가득 찬 시대에 살고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과 매연에 시달리고, 목소리 큰 사람이 성공한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삶의 일부가 된 스마트폰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도시 소음 속에 태어나고 자라는 요즘 아이들은 좀처럼 침묵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침묵에 대한 공포마저 느낀다. 심지어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미사전례 중에 휴대전화 벨소리는 침묵과 고요를 깨고 하느님과의 소통을 방해하기 일쑤다.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음에 인내와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랐다.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서 옆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안방에서 하듯 큰소리로 하는 통화는 짜증난다. 각종 휴대용 단말기에 연결된 이어폰에 흘러나오는 소음조차 참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소음공해에 노출된 채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희생되고 있다. 소음과의 전쟁이 불가피할 지경이다.

스마트 시대의 소음은 이용자 자신에게도 상당한 폐해를 가져다준다. 손 안의 PC라 불리는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과 연결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가능해지면서 거의 손에 떼지 못할 정도로 개인의 공적, 사적 시간이 식민화되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SNS의 지나친 이용은 중독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스마트폰에 너무 시간을 빼앗기고, 스마트폰이 없을 때 불안하며, 메시지를 수시로 검색하기에 집중력이 저하된다. 더욱 심각한 폐단은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삶의 의미 부여 내지 의미 발견은 불가능하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2011)의 저자 니콜라스 카는 인터넷과 멀티태스킹이 집중과 몰입, 그리고 깊은 사색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스마트폰이나 SNS는 이용자들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전락시킨다. 침묵 속에 실천되는 사색과 성찰이 결여될 때 우리 사회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위험사회’가 된다.

SNS 앱이 증가하면서 SNS 확인 및 게시글, 댓글 작성에 이용자 개인의 시간과 감정 소비가 크게 늘어나고 관리에 따른 피로감을 호소한다. 원치 않는 지인과의 일상 공유로, 일거수일투족 대중에 공개되면서 사생활이 침해받아 피로감이 높아간다. 또한 SNS 친구나 댓글 수가 개인 인기도나 사회적 성공의 가늠자로 통용되면서 숫자를 유지하거나 증가시키기 위한 시간 소요와 스트레스가 따른다. 정신적 이완과 심심함을 허용치 않는 분주함 속에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지면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낳는 전형적인 ‘성과 사회’와 ‘피로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그래서 스마트 시대에 침묵은 더욱 낯설어 간다. 

 

II. 침묵, 영혼의 쉼터

 

최근에 피정 센터나 수도원 혹은 마음수련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음공해의 전쟁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메말라 있는 영혼에게 목마름을 해소하고, 소외된 영혼을 회복하기 위해 고요하고 조용한 장소나 시간을 마련하려고 한다. 종교를 불문하고 불교의 템플스테이(산사 체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피정 센터도 주말이면 예약이 다 되어 있다. 각종 소음에 지친 사람들이 고요와 침묵을 제공하는 영혼의 쉼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태리 수비아코에 가면 ‘베네딕토 동굴’이 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베네딕토 성인은 젊은 시절 로마로 유학을 갔다가 도시 생활의 방종과 혼란에 회의를 느껴 수비아코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생활을 한 후 수도자로 거듭났다. 우리 모두에게도 베네딕토 동굴이 필요하다. 이 동굴은 고요함, 침묵의 장소를 상징한다. 침묵이란 동굴에 들어갈 때 세상의 소음이 멈추게 되고, 활동과 욕망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우리가 침묵이란 동굴에 들어설 때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올바로 들여다보는 성찰이 가능하다. 마치 맑고 고요한 호수가 하늘을 그대로 찍어내듯이 성찰은 또 다른 자신을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대면하게 한다. 타자화된 자아를 볼 때 자신의 진면목과 마주치는 순간이 된다. 양심이 제대로 작동되는 사람은 이 순간 적나라한 자신을 보고 인정한다. 마치 아버지 곁을 떠난 작은아들이 모든 재산을 탕진한 후 돼지가 먹는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을 때, 가장 비극적인 고통의 나락에 떨어진 자신을 발견한 순간 아버지께 잘못했음을 깨닫듯이 참다운 성찰은 한 개인의 진정한 회개로 이끈다.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회개의 배경에는 침묵이 존재한다.

침묵은 서로를 이해하게 해 주는 능력을 갖추게 해 준다. 어느 교구에서는 사제들이 모여 사목정책을 수립하는 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할 때 구성원 전원에게 의견의 불일치에 대한 자기 입장을 놓고 묵상하라고 요청한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 다시 모인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바뀌어 있다. 침묵하는 동안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III. 침묵 문화의 일상화

 

소음 공해에 찌든 현대인에게 소음 다이어트 요법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청각 식습관은 끔찍하다. 지나치게 기름지면서 영양가는 전혀 없는 소리를 늘 지나치게 섭취한다. 반면에 충분한 침묵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불건전한 식습관을 고치기 위해 패스트푸드 섭취가 위험하다고 경고할 뿐만 아니라 건강에 좋은 영양식이 무엇이고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침묵을 말할 때도 소음의 악영향을 말할 뿐만 아니라 침묵의 필요성도 강조해야 한다.

사람들이 차에 타자마자 라디오를 켜고,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켜는 이유는 자신과 대치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경우가 다반사다. 그만큼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실한 삶은 침묵을 통한 자기 성찰에서 이루어진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올해 홍보 담화문을 통해 올바른 말, 진실한 말을 위해 침묵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침묵은 우리가 받은 수많은 자극과 정보들 사이에서 올바른 식별을 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마더 데레사 수녀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다섯 가지 침묵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눈의 침묵, 귀의 침묵, 혀의 침묵, 지성의 침묵, 마음의 침묵이 그것이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침묵을 통해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듣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온 마음 다해 위로해 드린다고 고백한다.

매일 일정 시간 동안 TV를 틀지 말고, 음악도 듣지 말고, 단 30분 만이라도 홀로 앉아 고요히 ‘침묵 체험’을 해 보자. 영적 독서나 성체 조배를 통해 묵상기도와 관상기도가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영국이나 몇몇 나라에서 시민들이 추진하는 ‘소음감소운동’에 참여해도 좋겠다. 이것은 조용한 공간 운동을 펼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쌈지공원 조성하기’가 여기에 속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복음적 삶을 위해 시간과 공간에 침묵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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